칼
20대 윤●●
1월 29일.
팀(team)장이 이제부터는 매일 미팅을 가져야겠다고 했다.
Adaptive RF Task Force Team, 지난 1년간 수행한 연구과제의 외형적인 데모 (demo)를 위해 모인 사람들의 팀이다. 자체적으로 배터리나 내연기관 같은 전력 발생 장치가 없는 목표물에 무선으로 전력을 전달하여 움직이게끔 하는 것이 이 팀의 목적이다. 목표물이 움직이므로 그 이동 위치를 추적하여 최대 전력을 수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또한 이 팀이 해야할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이동체의 위치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이동체와 전력 전송용 기지국간의 데이터 통신이 필요하지만 기지국으로부터 높은 전력이 송신되고 있는 상태에서 둘 사이의 통신이라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를 안 팀장은 데모일자 며칠 전에 일방적인 기지국의 전력전송과 이동체의 전력수신이라는 목표 축소를 결정했다. 축소한 목표에 따라서는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데이터 통신을 위해 준비중이던 상당한 규모의 회로가 제외되었다. 전력 전송용 기지국과 소형의 모형 자동차로 꾸며진 이동체의 제작을 데모하는 날까지 완성할 수 있다 할 지라도 한번도 안 해 본 걸 교수님께 보여드릴 순 없었다. 또 제대로 동작한다는 보장은 더더욱 없는 것이다. 꾸며진 전체 시스템의 테스트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기지국과 이동체(이동국이라하는 것이 일반적인 표현이다)는 데모 3일전인 2월 2일까지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돌발사태로 지난 한 해 공들인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기지국 조합을 시작할 테니 빨리 위상천이기(phase shifter)의 튜닝(Tuning)을 끝내라."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기지국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안테나 뒷단의 위상천이기가 정확한 위상차를 만들어 줘야 했다. 2일 밤이었다. 데모가 5일이었으므로 그날 밤이 아니면 3, 4일 이틀밖에 안 남아 있는 상태였지만 난, 자야할 시간이었고 잤다.
3일 오전 9시.
여느 때나 다름없는 무기력한 아침이었다. 여전히 룸메이트의 PCS가 울렸고 나는 잠에서 깨었다. 몸을 일으키기 힘들었고, 강한 의무감이 나를 세면장으로 안내했다. 그런 의무감은 결코 일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최소한 9시에는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늦으면 아침을 못 먹는다.
위상천이기의 위상차를 조절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납땜 연기가 피어나는 좁은 실험실 안에서 안개 낀 새벽을 바라보고 서서히 밝아오는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면 이른 새벽의 따뜻함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 속에 파묻히면 시야는 좁아지고 생각은 사라진다. 갑자기 다른 종류의 일을 누가 하라고 했다면 그냥 자러 들어가 버렸을 것이다.
4일 아침 8시.
다시 해를 보니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미쳐있었던 건 아니다. 기숙사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고 연구실에 나와서 간밤에 자고 있던 선배를 깨웠다. 선배는 기지국 안테나를 제작하고 있다. 얼마 후 안테나가 완성되었고 안테나와 위상천이기를 널따란 금속판 위에 고정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다. 드릴로 구멍을 내고 볼트와 너트로 조여 주어야 했다.
4일 자정엔 전력 증폭기가 담당한 연구실로부터 도착했다. 기지국이 높은 전력을 송신하기 위해서는 위상천이기와 안테나 사이에 전력증폭기가 필요했다. 이들 사이의 연결은 물론 내 몫이었다.
5일 새벽 3시, 기지국이 완성되었다.
300개 가까운 드릴 구멍을 뚫었고 100여개의 도선을 연결하느라 수없이 남땜을 했다. 이동체인 소형 자동차를 가지고 4일 저녁에 합류한 팀장과 안테나를 만든 연구실 선배와 알고리즘을 담당한 사람과 같이 또 다시 밤을 새웠다. 기지국으로부터 빔 (beam)이 어느 방향에 어떻게 형성되는지 알기 위해서 무반향실 (anechoic chamber)에서 전계강도 (electric field intensity)를 측정했다. 지루한 작업이었다. 미리 프로그래밍해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할 지 모르는 일이었다.
5일 아침 8시.
최종적인 전체 시스템에 대한 실험을 할 수가 있었다. 미리 계산한 거리 1m를 사이에 둔 기지국과 이동국을 일직선상에 맞추고 전력을 전송했지만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동국을 제작한 사람이 이미 데모 장소인 천안으로 떠난 뒤였으므로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는 문제는 가서 해결하기로 했다. 거기 가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상당히 무모한 결정이었다.
5일 아침 10시.
샤워를 했다. 지난 49시간 동안 한잠도 자지 않았는데 정신은 멀쩡했다. 다리만 좀 아팠다.
아침 11시.
팀장의 자가용에 나와 연구실 선배가 동승했다. 팀장은 밤새운 몸으로 110Km/h를 밟아댔다. 천안에 도착하기까지 약 1시간 반정도 잠을 청할 수 있을까 했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도 팀장은 자꾸 나보고 눈 좀 부치랬다. 중간에 휴게실에 들러서 우동 한 그릇으로 아&점을 했다.
천안에 도착하자마자 설치를 시작했다. 무거운 측정장비와 신호발생기 등을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는 컨벤션센터의 복도 한켠에 기지국과 함께 설치하고 전원을 올렸다. 전력증폭기에서 단락 (short)이 발생했다. 데모 두시간 전부터 기지국 뒤편에 복잡하게 연결된 100여개의 도선을 하나하나 다 검사하고 원인을 찾았다. 새로 납땜을 할려니까 납땜기가 고장이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고생했다. 어렵사리 납땜기를 구해서 새로 배선을 했다.
데모시간 10분전, 기지국으로부터 전송된 전력은 이동국에 무사히 전달되었다.
이 모형 자동차는 분당 5mm의 속도로 앞으로 전진해 나갔다. 시작은 정말 힘들다. 그 결과는 미미하기 짝이 없고 인정해주는 사람도 드물고 '수고했어'라는 말 한마디 듣고 나면 여간 불만이 아니다. 하지만 곧 스스로 위안이 되고 만족하게 된다. 아마 지쳐서 그럴 거다. 6일까지 세미나가 계속되니 그날은 미리 마련된 호텔 방에서 자야했다.
데모가 끝난 뒤 회식시간에 팀장과 나는 소주잔을 수없이 교환했다. 그날은 이틀 밤을 꼬박 새고 먹은 거라곤 튀김 우동 한 사발뿐이었다. 술과 고기가 어느 정도 들어갔을 때 식당 아줌마가 조그만 사발에 숭늉을 가져왔다. 나는 숭늉을 다른 그릇에 비우고 아줌마에게 똑같은 사발 하나를 더 부탁했다. 소주가 딱 한 병 들어간 그 사발을 나는 팀장에게 권했고 나도 같은 내용을 마셨다.
5일 밤 9시 나는 쓰러졌다.
그렇게 깨어있던 60시간이 끝났다. 평소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던 팀장은 거기 참석하신 많은 교수님들 앞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난 딱 24시간 동안 잤고 중간에 가끔 눈을 떴으나 다리가 너무 아파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얌전히 쓰러진 나를 교수님들이 눈치 채지 못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일주일 뒤 난 모 교수님 앞에 불려 갔고 나의 객기를 이해해 준 교수님께 감사해야 했다. 그 회식 자리에는 멀리 경북대에서 온 고등학교 동문형이 있었다. 쓰러진 날 호텔 방까지 업어다 준 그 형을 오랜만에 술자리에서 다시 보니 여간 마음이 편한 게 아니었다. 나의 객기는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내 자신이 내가 공부하는 곳에서 직접 만들어 가는 인간관계는 왜소하기 짝이 없었다.
일요일엔,
경대 대학원 석사 졸업을 하고 대전에 취직해 있는 친구와 같이 대전 시내를 돌아다녔다. PCS를 하나 장만했다. 월요일 오후라야 개통이 된단다.
내가 얼마간의 초라한 삶을 살아오면서 일관되게 지켜온 방식은 소비자가 되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많은 것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편하게 살았다. 한번씩은 겪어야했던 골치 아픈 문제들을 경험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니 대학원생이라는 신분은 참 어정쩡하다. 창조적인 생산자도 아니고 소비문화를 향유하는 젊은이도 아니다.
PCS가 개통되자마자 예전에 알고 있던 전화번호를 눌렀다. 언젠가부터 걸리지 않는 번호였지만 난 꽤 오래 기다렸다.
2월 10일 수요일.
나에게 대순진리회에 나오라고 얼마간 따라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인생은 도(道)라면서 도인을 만나 보라고 했다. 그날 때마침, 참여연대 박원순변호사의 강연회가 있길래 데려갔더니 이젠 그런 얘기 안 한다. 난 인생은 너무나 다양하다고 얘기했다. 그 친구가 이해했을 리 없다. 언젠가는 다시 설득을 시작하겠지.
노신(魯迅)은 젊은 시절 비분강개 (悲憤慷慨)하던 마음을 억누르느라 힘들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영혼의 마취'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외친 뜻이 적막감이 되어 돌아 올 때 그는 사람들을 만나고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피해서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연락이 안 된다. 어느 순간엔 과거의 모든 걸 다 지우고 싶어진다.
그래서, 마취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칼이 들어오면 어지간히 아픈 게 아니다.
예전에, 1999년에 썼던 수필. 동아리에서 1년에 한번씩 발간하는 미동회지에 실었던 글이다. 지금 읽어보니 그때 기억이 새롭네. 언제나 굳은 일만 맡아서 하는 걸, 멋이라고 여겼던 시절. 그렇게 20대 후반 시절을 허무하게 보냈던 것에 대한 절망감이 아직도 내 머리와 온몸을 괴롭히고 있다. 후회로만 가득했던 ... 잃어버린 8년 ... 열정이라 생각했던 젊음에 대한 배신감을 다신 겪지 않길 바랄 뿐이다.
-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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