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 미동 연회지 스물여덟번째 판에 실린 수필)

내가 아주 어릴 때 초등학교 3,4학년 때쯤이었다. 학교 가는 길이 두 개가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2차선의 큰 도로에 면해 논을 낀 길이 있었고, 거리는 더 가깝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집 담 사이의 골목이 연결된 길이 있었다. 남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을 어느 날 걷고 싶어졌다. 미로 같은 골목길이 이어져 있으니 재밌기도 했다. 굉장히 길고 좁은 길이었으며, 양쪽으로 가시 무성한 탱자나무가 빼곡이 심기어 있는 구간에서는 햋빛이 잘 들지도 않았다.


그 좁은 길 끝에 아주 크고 오래된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내가 그 나무 주위로 한바퀴를 다 도는데 꽤 시간이 걸렸을 만큼 큰 나무였다. 자세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아마 나무는 죽어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쯤 해서는 나무가 잘려나가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둥치며 줄기며 가지들, 그 모든 게 검은색이었다. 이파리 하나 없이도 무성한 가지들이 시커멓게 하늘을 덮고 있어서 나무 아래에 서서 올려다 보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날, 내가 혼자서 집에 가는 길로 택한 그 나무 옆을 지나가고 있을 때, 나무의 그 꺼멓던 가지들 사이로 흰천이 하나 펄럭이고 있었다. 밑에서 올려다보아 음산한 가지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흰 천이 마치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 속에 남아 버렸다. 며칠 뒤에 나의 작은 초등학교에는 그 흰 천이 어느 처녀가 자살하면서 목매단 데 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어른들에게서도 들었으니 그건 아마도 꽤나 신빙성이 있었으며, 나 또한 그걸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내 생각 속에서 잊혀지고 그 후로도 한참이나 그 장면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커먼 하늘에 펄럭이던 유난히 하얗던 그 천을 ...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내가 스물 다섯이 되고 석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새벽까지 밤을 지내며 마지막 학위 논문 심사 몇 일전을 앞두고 긴장된 날을 보내고 있었다. 들기 힘든 잠을 겨우 청한 기숙사 침대에서 똑바로 누운 채 눈을 뜬 나는 어두운 기숙사 천장 뒤로 시커먼 가지 사이의 높이 펄럭이고 있는그 하얀 천을 보았다. 난 평소 내 성격이 그래도 밝은 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악몽 같은 걸 꾸어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것도 어릴 때 터무니 없는 만화에서 본 괴물같은 것이 나오는 꿈 한 두 번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날 밤은 너무나 무서웠다. 소리를 어찌나 질러댔든지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의 목에서 기침이 터져 나와서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지고 없었다. 논문심사가 무사히 끝난 뒤에도 그 흰 천은 계속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원인을 곧 찾았다. 기숙사 침대가 좁다보니 어느 샌가 오른팔을 머리위로 올리고 자는 잠버릇이 생긴 것이다. 내가 악몽을 꿀 때마다 내 오른팔이 저려 있음도 깨달았다. 다시 팔을 내리고 누워 자기 시작했고 다시 가위에 눌리는 일은 없었다. 나는 내 문제에 내 식대로 과학적으로 접근해서 해결을 했다. 그렇게 생각한다.

과학적이란 말이 약간 어폐가 있긴 하지만. 그러면 왜 하필 그 기억이었을까. 희미하게 각인된 흑백 영상만을 간신히 기억하고 있을 뿐인데... 그게 왜 그렇게 무서운 기억으로 남았을까. 예전에 어느 미동 MT에서 조그맣게 모여 앉아 소주 한잔 놓고 서로의 가위눌린 경험에 대해서 얘기하던 밤이 생각난다. 그땐 왜 사람들이 그런 악몽에 시달리고 있을 까라고 생각했었는데, 당하고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1999년이 가고 있을 때, 연구실 벽에 걸려있던 달력이 1998년 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 아무도 몰랐을까. 달력치고는 2년을 살았으니 꽤나 오래 산 샘이다. 가차없이 처단했다. 내가 아니면 그 달력은 1년을 더 살 뻔했다. 3년은 용납이 안 된다. 게다가 21세기는 더욱 더 ...

20세기의 마지막 밤, 천년을 살지 않았으니 가는 천년이 아쉬울 리도 없고, 새 천년이 기대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백년을 살지 않았으니 1900년의 마지막 날들이 안타깝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1999년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1999년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박사과정의 첫해를 보낸 이유에서다. 열심히 했는데, 얻은게 없었다. 열심히 하고 있는지, 이게 정말 열심히 하는 건지, 남들도 이렇게 하고 열심히 한다고 얘기들을 하는지, 이렇게 하고서 힘들다는 말을 하는 건지 몰랐다. 가끔씩 두통에도 시달렸다. 어떤 땐 두통약 없이 일주일을 견디기도 힘들었다.

내가 살고 있는 건, 무미건조한 느낌의 흑백으로 - 내가 흑이면 내 주위는 백이고, 내가 백이면 내 주위의 사람들은 흑이 되고 만다. 의견충돌은 회색을 낳지 않는다. 무관심과 뒷북(back drum ?)으로 이어진다. - 천연색이 가득한 활발한 영상이 아니라 흑백의 스틸 사진처럼. 그렇게 정지된 모습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곤 한다.

'내 손끝에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1998) - 아취 (雅趣) (2 of 2)  (0) 2008.08.10
소설 (1998) - 아취 (雅趣) (1 of 2)  (0) 2008.08.05
아무 일도 아닌 듯 ... (소설 1995)  (0) 2007.09.21
Essay 2001  (0) 2007.01.28
Essay 1999  (0) 2006.08.07
:

공지사항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725)
INTRO (22)
제이, 스치는 ... (105)
내 손끝에서 ... (14)
신산한 세상살이 (57)
PEOPLE (15)
FOOTBALL (20)
REVIEWS (54)
DSLR (170)
Tiny Lens (94)
Pencil and colors (52)
Graphic and design (20)
전자파의 공포 (6)
유리돔에 갇힌 나체 (17)
Tech Savvy (6)
Technologies (31)
Electromagnetics (42)
임시보관함 (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달력

«   2026/08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otal :
Today : Yester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