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95년에 '미동회지'를 통해 발표한 소설, 일련의 수필들보다 먼저 썼던 작품이다. 처음 뭔가를 써본 것이서 서툴기만 했다.또 자신이 없어서 인지 다른 작품을 많이 인용했다. 소설가의 첫 작품엔 자신의 모습이 많이 투영된다던데, 그때나 지금이나 내인생이 밋밋하긴 마찬가지 인가 보다. 지금도 내 인생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제이 |
아무 일도 아닌 듯... |
1995년 이른 봄. 윤정호 |
1. |
| 1993년 11월. 대학 1년이라는 세월이 저물고 있다. 이젤 앞에 앉은 지 네 시간. 하나의 낙서장이 완성되었다. 참으로 아까운 종이다. 학생으로서는 상당히 고가의 이태리제 F지인데. 시험이 다가와서 그런가? 아무도 없는 곳에 앉아 있어서 그런가? 마치 나만 홀로 딴 세상에 사는 사람같이 느껴진다. 합판을 물리고 이젤을 접는 순간 몇몇 선배들이 M서클의 문을 열며 들어 서고 있다. 모두 입에 담배를 물고 있다. 예술가는 다 저래야만 되나. 「저 가겠습니다」. 그들이 뒤에서 뭐라고 그러는데, 남이야 집에 가건 말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파레트, 붓, 물감이 제멋대로 풀어진 물통을 화실바닥에 그냥 내버려둔 것 같다. 동아리가 많이 모여 있는 학생회관건물을 나와서는 도서관에 가서 가방을 찾아야만 했다. 분명 이 자리에 놔둔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저긴가, 아니 이 층이 아닌가. 모든 술자리-친구들의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버스승강장(BUS 昇降場)에 무사히 도착했는데, 버스를 잘 못 타는 바람에 또 한번 토큰과 시간과 만원버스에 시달리는 허리의 통증을 감수해야만 했다. 불쌍한 내 허리, 이 도시의 공무원들은 버스에 사람을 나누어 태울 줄도 모르나? 우리 버스 옆에 서 있는 저 버스는 도대체 어디로 가길래 저렇고 텅 비어있나……. 여기에서 내려서 두 코스는 걸어가야 한다. 그래도 저번에 약속에 늦을까봐 잘못 탄 버스에서 내려서 일곱 정거장을 허벌나게 뛴 것에 비하면 이건 사소한 문제다. (난 도대체 뭔가?). 인간이 아니면 머리가 비어 있음에 틀림없다. |
| 2. |
| 소설책이나 하나 사려고 상당히 늦은 시간에 가까운 서점에 들렸다. 그녀가 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점원이었다. 눈이 크고 뾰족한 코, 너무나 귀여운 모습이었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를 눈동자, 자기가 지금 읽고 있는 책에 시선을 두고 있는 지 그렇지 않은 지조차 모를 정도의 멍한 듯한 갈색 눈동자였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녀가 보고 있는 책, 「어-, 학생왔는교.」 할머니가 나왔다. 「예, 안녕하세요.」 그제서야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또 한번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인사를 건넸다. 머쓱했다. 그녀는 들어가 버렸다. 할머니를 한번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집에 와서는 방금 사온 책에 대해서 까마득하고 잊고, 그녀 생각에 잠겼다. 눈이 예뻤다. 누구한테 물어봐도 그럴 것이다. (물어볼 사람을 생각해 둬야겠다.) <계약 커플>! 이런 책도 다 있담? 책을 보려는 순간 잠이 들어 버렸다. 꿈나라로 들어간 나는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할머니한테 누군지 물어볼 걸! |
| 3. |
| 오랜만에 한 녀석이 수업 끝난 뒤 한잔 하잰다. 고등학교 때 집 근처에 있는 독서실에서 만난 '김'이라는 친구였다. 나보다 더 공부 잘 했고, 농담도 잘해 항상 주위가 시끌벅적했다. 소위 명문대라는 서울 S대에 갈뻔한……. 지금은 나하고 같은 지방 K대 전자공학과라는 데 있지만. 항상 그 녀석의 입에서는 '노래공장'의 민중가요가 떠나지 않았고, 술이 조금이라도 들어갈 때면 이 나라의 국가원수나 정치관계자들을 비판하곤 했다. 제철을 만난 것인지 올해 여름은 유난히 시끄러웠다. 「킁!……… 그거 미국놈들 꼭두각시 노릇밖에 더 되냐…….」 「야-, 인지 우야겠노. 군대 안 갈려면 공부나 열심히 해라. 국가 원수에 대한 모독은 도덕시간에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잖아?…… 딴 얘기하자…… YY하고는 잘 돼 가냐…… 저번에 단둘이 여행가기로 했다면서 조오하하더니?」 「킁! 안간단다. 다 믿어도 난 못 믿는단다.」 「둘만 간다는 얘기는 안 했다며?」 「킁! 어떻게 알더라. 어쩌겠냐…? 헤헤, 모르겠다. 술이나 먹자.」 |
| 4. |
| 11월 27일, 쌀 시장개방을 반대하는 한총련 소속 대학생 3백여명이 경북궁 앞 전철역에서 기동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
| 5. |
| 12월.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종강도 많이 했고 시험도 많이 쳤다. 아무도 없는 서클룸에 앉아 기타를 치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다행스러운 일은 내가 기타를 배웠다는 것이다. 내 왼손가락이 C에서 G7/C로 옮겨가고 있었다. 「Look in-to my- ey-es- You will see- what you mean to- me……」 '똑똑'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예.」 93학번으로 보이는 여자가 화실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 들어와도 될까요? 4월에 입회원서는 썼는데요. 그동안 바빠서 들를 수가 없었네요. 너무 늦게 온건 아니죠?」 입학한지 얼마나 됐다고 바쁨을 논하냐. 비록 일년이 다 되간다고 하여도. 그리고 이런 꼭두새벽엔 왜 찾아와서 사람 괴롭히냐? 「글쎄요.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요. 관계자가 조금 있으면 출근할텐데 조금 기다릴 수 있으세요?」 「언쩨쯤…?」 「통례로 봐서는 …… 아침 9시 45분이니까. 올 시간이 다 되었는데.」 그 순간 우리 회장님께서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다. 수업이 6분 일찍 끝났나 보다. 「회장님, 신입생 받으세요.」 「어! 그래? 너는 이렇게 예쁜 동기가 들어왔는데 기쁘지도 않냐? 벌써 한 4학년은 된 선배 같네!」 「겉으로는 이래도 속은 좋아 죽겠습니다……. 수업 들어갔다 올께요.」 물을 열고 나서면서 그녀를 한번 뒤돌아보았다. 그녀 또한 내가 나가는 장면을 신기한 듯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익은 듯한 눈빛이 마주쳤다. 깔끔하면서도 약간의 바람끼가 묻어나오는 옷차림이었다. 어디서 본 것일까? |
| 6. |
| 12월 5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강 시민공원에서 농협주최로 열린 「쌀개방 결사 저지 전국농협인 궐기대회」에서 2만 8천여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 7. |
| 시험이 다 끝나간다. 그러면 방학이다. 지독한 법학개론교수만 남겨놓고. 대학 1년 동안 부모님을 착취해서 모은 돈으로 삐삐를 하나 샀다. 그들은 아무 생각없이 공부만하는 장한 대학생을 둔 불쌍한 프롤레타리아였다. 미국의 저 유명한 모토로라사가 최근 동남아 시장을 겨냥해서 내놓은 신제품이었다. 사용하기 편리하고 창이 옆으로 나있는 모양이 특이해 요즘의 젊은 신세대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리라. 나 또한 그들의 일원이라는 생각에……. |
| 8. |
| 「언-제부터인지- 그댈 멀게 느낀 건--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는 걸 본후……」 목소리가 낮았다. 그러나 허스키했다. 자기가 보고 있는 책에 시선을 두고 있던 그녀는 내쪽을 쳐다보고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한다. 먼저 말을 건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스칼렛>? 그게 뭡니까? 재미있어요?」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후속편이예요. 재미있는 지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방금 읽기 시작해서……」 ………………………… 「뭔가 권유하고 싶은 책 없어요. 앞으로 책을 많이 읽고 싶은데 책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어서 말이죠.」 그녀가 그 뒤로 길게 말을 이어갔다. 내용은 대강 고전을 많이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제시한 그 많은 책들을 기억할 만큼 내 머리는 그렇게 좋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권한 것은 괴테의 <파우스트>였다. |
| 9. |
| 괴테! 독일 고전파의 대표자. 낭만주의의 병적 경향이 싫어 고전주의로 전향했으나 문학에 있어서 낭만적 요소를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 재미없고 지루한 대사가 계속 되었다. 아니 그런 대사는 익숙하지가 않았다. 파우스트가 순수 희곡으로 된 문학이라는 것은 처음 알았다. 간신히 <1부>를 독파했다. <2부>를 읽을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모든 대사가 한마디 한마디 이해하기 힘든 시였다. 오직 파우스트와 멤피스토펠레스가 계약-계약이라는 표현이 맞는지, 틀린지 모르겠지만-을 하는 장면만이 기억이 난다. 자네가 달콤한 말로 나를 속여서, 황홀한 기분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향락으로 내 눈을 멀게 만든다면, 그 날이 나의 마지막 날인 줄 알게! 자, 내기를 하자! 멤피스토펠레스가 나에게도 찾아오면 좋겠다. 거부할 수 제안을 가지고. |
| 10. |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란 시를 아세요? 아마 그 책에 나올걸요.」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게 우스웠는지 환한 미소를 짖고 만다. 「음-, 내용은 정확히 모르지만 강해서 살아 남은 자는 자신이 미워진데요. 오빠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 되요. 그리고 절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 「그래? 그럼 뭐 배우까? 태권도? 쿵후? 유도? 요즘은 택견이 잘 나가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항상 원인 모를 우수가 담겨있었다. 우수가 만들어 내는 미소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눈에 띄는 매력이 없는데도 우수와 고독에 젖은 듯한 눈동자는 그녀를 아름답게 만들기까지 했다. 서점에서 나와서 버스정류장을 하나 지나고, 우리동네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비디오방을 둘 지나고, 우리동네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편의점을 셋 지나고 길고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우리집에 도착했다. 내방 문을 열고 들어가 내가 산 책을 누런 봉투에서 꺼내 보았다. 민음사(民音社) 출판, 박일문 장편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 '김'이라는 내 친구는 집요한 설득 끝에 자신의 친구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책을 사께끔 유도하는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 '우리 시대의 5·18세대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 정녕 그 친구는 나에게 이런 책을 권하는가? |
| 11. |
| 책이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이런 류-난 사실 5·18이 무언지도 모른다-의 소설은 처음일께다. 지난 번 읽다만 파우스트를 뺀다면 난 중학교 이후로 제대로 된 책 한권 읽은 적이 없다. <파우스트> 또한 제대로 읽지 못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교과서 이외에 본 책은 기껏해야 고등학교 때 몰래 보던 <플레이보이>誌 정도. 첫장을 넘기고 두장을 열면서 책에다 한줄씩 한줄씩 줄을 그어 나갔다. …………………………………… '1980년 12월 8일 오후 1시, 내 어머니가 지구를 떠났다.' '지구란 살만한 행성이 못 된다.' '…… 그녀의 처녀에 대해서 추궁하더란 것이다' '육체와 영혼의 끝없이 고갈된다.' '이 세상의 남자들이죠. 참으로 비겁하고 비굴한 …… 천민의식을 가진 짐승들이, ……' '…… 째진 옷 틈 사이로 그녀의 성기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예술하는 여자들을 보니까, 대개 생머리를 했더군요.' '나는 디디가 깔아주는 요 위에 드러누웠다.' …………………………………… 아마 줄친 부분을 다시 읽을 일은 내 인생에서는 없을 것이다.' |
| 12. |
| 그녀가 '뒤마 피스'의 <춘희>를 권했다. 거리의 여자이면서도 마음 밑바닥에는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은 순정을 가지고 있었고, 참된 사랑에 눈 뜨게 되자 모든 것을 던져 애인에게 바치는 마르그리트의 절대적 사랑이 그 주제이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다. 어떤 기독교 학자의 애기이다. …………………………………… 좀더 쉬운 책을 권해달랬더니,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권했다. 재미도 없고 이해도 안 되어 읽다가 말았다. '아름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으므로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어린 왕자의 얘기 …… 방안에 불을 꺼고 창문을 열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도회지의 하늘답지 않게 오늘은 밤이 까맣다. 맑고 순수한 눈을 반짝이며 나를 지켜보고 있을 어린왕자 …… 어린왕자 …… 어린 ……! …………………………………… 일요일 아침, 세상에 일어나 도시의 중심부로 나아갔다. 그녀에게 뭔가 선물해주고 싶다. 그냥 그렇게 맑고 순수한 눈을 가진 그녀에게 나의 마음 밑바닥에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은 순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
| 13. |
| '김'이 이영진씨의 <6.25와 참외씨>를 권했다. 시집이었다. 시란 원래가 무슨 느낌이 있어 멈춰서지 않는 한 계속해서 줄줄 읽어 내려가는 문학이어서 단숨에 읽어 버렸다. '김'이 읽고 난 후에 대해서 물어 볼 때를 대비해서 뭐라고 할말을 준비해야 하는데 …… 5·18이 뭔지나 물어봐야겠다. |
| 14. |
| 며칠 뒤 '김'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술이 취한 체 …… 「여자 하나 소개시켜도 …… 너거 서클에 이쁜 아 많데 …… 지랄, 운동 같은 건 포기했다. 애인 하나 만들고 군대나 갈란다.」 난 그러마 하고 농담처럼 넘어가 버렸다. |
| 15. |
| 이 즈음에 윤종신의 '오래전 그날'이 서서히 감수성이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 나갔다. 그녀가 내가 생각하는 그 '너'라면 그녀는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만난 '너'이다. 그녀가 경리를 보는 직장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내가 자동차학원에서 돌아오는 시간과 일치하면 난 그녀와 버스정류장에서 만나-만나고 싶어 기다린 적이 많았다.- 서점까지 약 10여분간 같이 걸어야만 했다. 난 서서히 그녀에 대해 의무를 느껴가고 있었다면 ……. '너-의 집 데려다 주던 길을 걸어며 수줍게 나눴던 많은 …….' |
| 16. |
| 1994년 1월, 학교 가는 길. 버스 안에서 MR.2의 '하얀 겨울'이 흘러나왔다. 이 아침은 이렇게 기분 좋게 출발하고 있는데. 아침부터 삐삐가 왔다. 중도 가는 길에 횡단보도를 막 건널려는데 뜻하지 않은 것이라. 주저 않고 말았다. (아이구, 쪽 팔려) 음성사서함이었다. 북문에 들어서자마자 공중전화가 있었다. (여기에 공중전화가 있었던가?) 「킁, 내 '김'인데. 소개팅 어떻게 됐냐? 빨리 소개시켜도.」 귀찮은 놈! YY는 어쩌고 답답하면 헌팅해서 하나 구하지. 극히 이례적으로 방학 중인데도 아침 일찍 화실에 갔다. 누구라도 있으면 그냥 붙잡고 '김'에게 소개시켜 줄려고. 월초(月初)에 들어온 여자가 화실에 혼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잘됐다. 그 여자에게 다가가서는 혹시 소개팅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여자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좋아 죽는 모양이다.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억! 이럴수가. |
| 17. |
| 성명, KK. 주소, 대구시 수성구 중동. 이름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달랐다. 하지만 그녀와 너무나 닮았다. 작년 11월 20일, 공전은 히트를 기록할 'MR.2'의 '하얀 겨울' 앨범이 세상에 첫선을 보이던 날. 아무 생각 없이 들렀던 우리 집 근처의 아담하지만 영세한 서점, 차가운 겨울비가 오는 날이면 진열해 놓은 책 사이로 빗물이 떨어지는 가난한 할머니와 그녀의 혼자뿐이 손녀가 TV와 우리사회 대중매체가 만들어내는 베스트셀러만으로 세상을 접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그 서점의, 그 소녀. 그녀와 너무 닮았다. 이 나라, 이 분단국가의 특수성 때문에 '대한남아(大韓男兒)'라는 칭호를 얻는 내가 과연 그 대한남아로서의 품질이 어떤가를 검사 받기 위해, 일명 신체검사를 위해서 서구병무청신체검사장을 방문했을 때 뜻하지 않게 눈이 안 좋아 2급이라는 판정을 받았을 때-내 눈이 나쁘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이세상에 생긴 뒤로 두 번째로 내 눈을 의심했다. KK 또한 아름다웠다. 다만, 그녀한테서는 보기 힘든 밝음을 가지고 있었다. |
| 18. |
| 그녀가 리쳐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권했다. '김'에게 그녀에 대해 처음 얘기하면서 이 얘기를 했더니 읽어 보았는지 이상한 말을 했다. 「킁, 우리가 우리 시대를 앞서 살건, 우리 시대의 다른 사람보다 사는 방식에 있어서 유행에 앞서건 상관없다. 단지 중요한 건 언제 어디서나 자기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상세계에 끝없이 도전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은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난 언제나 책하나 읽었다고 거기에 나오는 무슨 깊은 뜻이나 있는 듯한 문구를 외워대며 잘난 척하는 사람이 싫었다. 그런데 '김'마저도 그러니 약이 올랐다. 하지만 난 그 문구를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못 찾았겠지. '김'이 지어낸 말일 리 없다.) |
| 19. |
| '김'이 KK와 만나는 날은 왠지 불안했다. KK가 분명히 날 욕 할거다. 무슨 저런 남자를 소개시켜 주느냐고? 하지만 어쩌겠냐? 후문의 S 커피숍에서 둘-'김'과 나-이 먼저 만나 KK가 오기를 기다렸다. '김'이 담배를 하나 물었다. 담배 끝에서 올라온 연기는 눈높이만큼 올라와서는 흩어졌다. 빠른 공기의 흐름을 타고 좌우로 흩어지던 담배연기는 어느새 KK의 얼굴이 되었다. 「어! 왔네.」 KK가 왔다. '김'이 어설프게 고개를 꾸벅인다. YY하고 깊은 교제를 할 만큼 여자 다루는 끼는 어느 정도 발달되어 있는 놈이었다. 나는 둘이 인사만 시켜주고 빨리 커피숍 밖으로 나와 버렸다. 누구 하나라도 날 원망 어린 눈길로 바라볼까 겁이 났다. 커피숍 바깥에는 우연인지 YY가 와있었다. 자기 친구 한 명과 막 거기로 들어 갈려고 하고 있었다. 지질학과 93학번 YY. 청바지에 T셔츠, 색이 바랜 갈색 가죽잠바를 즐겨 입는 YY는 이지적으로 생긴 여자였다. '김'하고는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는데 안됐다. 전통차 사주겠다고 하고는 간신히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힘들다. 자식이 이렇게 예쁜 YY를 놔두고 다른 여잘 소개 시켜달래? |
| 20. |
| 그녀에게 선물로 뭔가 사주고 싶었는데, 내가 누구에게 무언가 선물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학교를 구경하게 해준댔더니 쾌히 승낙했다. 아직 방학이고 게다가 특강마저 없는 일요일이라서 학교 안은 꽤나 조용했다. 제2의 다운타운이라고 생각해오던 우리학교 북문도 조용했다. 마치 폭풍전야 같았다. 무슨 불길함일까. 그녀는 대학교라는 데 처음 와보나보다. 연신 깨끗하고 운치가 있다는 말이 쏟아져 나온다. 그녀가 순수와 이상의 안식처라고 생각하는 대학에 내가 속해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 나의 순수함을 보여줄 수 있는 무엇이었으면 좋겠다. |
| 21. |
| 모 재벌 제약회사의 딸, KK에 대한 이야기가 '김'으로부터 전해졌다. 내 생각으로는 '김'은 그런 신분을 가진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다. 그가 언젠가 말했던 '재벌타도'라는 구호가 생각난다. 내가 '김'에게 가치관의 혼란을 강요하는 어떤 요인을 제공한 것은 아닐런지. 고급 자가용을 몰고 학교로 출근하는 KK. 그녀의 옷은 항상 패션이라 부름을 말했고 몸에 꽉 끼는 니트 T셔츠는 관능적이었으며 긴 스타킹 위에 입은 미니스커트는 아슬아슬했다. 햇빛에 비추어보면 KK의 머리카락은 금빛으로 빛났다. 내 친구들은 KK의 머리카락을 보면 왜 저러지라고 한다. 하지만 난 (어떻게 저렇게 하지?)라고 하는 의문이 먼저 생긴다. 염색일까? 탈색일까?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둘은 서로 좋아한다는 것이다. |
| 22. |
| 서클에서 회지를 제작하느라 열심히 워드를 치고 있는데 누군가가 북문에서 데모가 벌어졌다고 한다. 아니 이런! 남들 다 노는 방학에 데모라니? '김'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대강당과 북문 수위실 사이의 담장에 서서 시위하는 청년학도들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김'이 얘기해주던 91년 5월 항쟁이라 부르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와는 많이 다른 모양이다. 내가 아직 닭장 안에 갇혀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있을 때, TV News 속의 대학생들의 데모와도 많이 달랐다. 데모는 거의 끝나가는 모양이다. 대학생들과 같은 젊음을 가진 전경들은 저 위 언덕으로 쫓겨가 있는 듯 했다. 북문 앞의 모든 가게들은 셧터를 내렸고, 학교 앞을 지나다니던 버스는 어디로 돌아가는지 보이질 않았다. 모여있던 학생들이 줄을 지어 개선한 듯 늠름하게 학교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학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몇몇 학생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그들이 자랑스러운 것일까? 저들 중 몇몇이 들고 있던 쇠파이프에 대전(大田)에서 전경으로 근무하던 내 사촌 형은 죽을 뻔 했다. 이런 모습들을 설명해 줄 '김'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
| 23. |
| 2월 10일, 설날이다. 도시가 텅 비어있다. 도시가 비었다고 생각하니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저속에는 누군가가 내일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찾아 오고야마는 내일, 찾아온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답답했다. 내일 다음은 모레지 아마. 눈이나 왔으면 좋겠다. 눈구경한지도 오래됐다. 이 도시는 눈이 안 와서 …… 눈을 본지 몇 년은 된 것 같았다. 아침부터 큰집에 있는데 점심때가 되어서 YY한테서 삐삐가 왔다. 학교 휴학하고 디자인 학원 다닐 모양이다. 그냥 학교 다니지 …… 어렵게 들어간 대학인데, 그러고는 점점 내가 좋아진단다-아마 KK에 관해서 아는 것 같았다. '김'과 YY가 왜 잘 어울렸는지 알 것만 같다. 둘다 똑 같다. |
| 24. |
| 2월 11일 밤. 아침부터 먹구름이 잔뜩 끼여 흐리더니 오후에는 서서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발이 점점 굵어져간다. 아무래도 눈이 많이 올 것 같다. 아침에 KK가 우리집에 전화했다. 저녁에 '김'이랑 셋이서 술한잔 하잰다. 귀찮았다. 그래서 거절했다. 둘이서 많이 마시라며. …………………………………… 저녁에 '김'에게서 삐삐가 왔다. |
| 25. |
| 「킁, 임마! 내다. '김'이다 ……. 나 15일날 의정부 들어간다. 임마.」 「…………」 말이 안 나온다. 15일! 왜 얘기하지 않았지. 「킁, 임마! 듣고 있냐 ……?」 「왜 진작 얘기 안 했는데? 알았으면 술이라도 한잔했지. 나 몇일동안 바쁘단 말야.」 「킁, 술 좋지. 그래서? 니가 내 기분 이해할 수 있냐? 왜 내가 감당할 수도 없는 여자를 나한테 소개시켜주냐?」 「그래? 왠지 애가 너무 고급스럽더라.」 「킁 …… 푸후우 ……. 넌 내가 87 민주화 항쟁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던 열사 같은 선배님들만큼이나 정열적인 운동권 학생이라고 생각하냐? 자신이 선택한 혁명을 위해 ……」 「무슨? 그 반의 반도 못 따라가지.」 「킁 …… 그래? 그러면 학교에 자가용 몰고 무스탕 가죽잠바 입고 다니며 유흥비나 쓰고 다니는 그놈의 신세대 대학생같이 보이냐?」 「…… 아마 아닐걸 ……」 농담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킁! 아니면 도서관에 파묻혀서 내 젊음과 청춘을 학문연구와 진리탐구를 위해 바치는 이 나라 전자공학계를 이끌어 갈 학도냐?」 「…… 글쎄 ……」 「킁, 야 임마! 나 죽고 싶다. 그냥 이렇게 죽고 싶다구-.」 아찔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그러지 말고 우리집에 와라. 오늘은 우리집에서 자라. 늦어도 안 자고 기다릴테니까. 더 이상 부담되게 만들지 말고 얘기나 좀 하게 우리집에 와라.」 |
| 26. |
| 2월 12일.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와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나는 더럽고 칙칙한 도시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한껏 받은 환상의 도시 위에 서있다. 어젯밤 우리집 앞에서 사람 하나가 얼어 죽었다. '김'이었다. KK하고 작별 인사한 후 떠남을 알리기 위해 나에게로 찾아왔다. 술이 만취해 있었고 우리집을 오기 위해 지나는 기나긴 골목길에서 내일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이 잠이 들게 말았다. 삐삐를 받고 '김'을 기다리던 나는 어느새 따뜻한 방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죽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를 원망하지 않았는지, 갑자기 죄책감이 온몸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를 위한 의무이자 형식은 내 눈에서는 흐르지 않고 있었다. 흘릴 수가 없었다. 진정 슬픈 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법이다. |
| 27. |
| 오늘도 눈이 온다. 눈이라기 보다는 짖눈개비였다. 이 더럽고 지긋지긋한 도시에서도 이렇게 많은 눈이 올 수가 있구나. 그 친구의 집 앞에는 아주 작고 초라한 화한이 두 개 놓여있었다. 녹슨 대문을 여는 순간 그의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얼어죽을 무덤! 결혼도 못하고 지 아버지보다 먼저 죽은 불효막심한 놈한테 무덤이라니 …… 화장해서 아무데나 뿌려버렷!」 시장에서 배추장사를 하는 강자(强者)였다. 약한 자는 죽었고 그 약자(弱者)의 강한 아버지는 자신도 감당 못 할 말들을 내뱉고 있다. 운이 없었던 까닭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어서 자신의 아들만 멀고도 긴 여정의 배에 띄어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김'은 그렇게도 떠나고 싶어하던 집은 떠났다. |
| 28. |
| 나는 지금 꿈속에 있다. 꿈속의 나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세상에서 유일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던 '김'이라는 내 친구의 상실감을 슬퍼하고 있다. 내 앞에서 '김'은 화염병의 불길에 휩싸인 채 누군가가 쏘아대는 M16의 난사로 서서히 50도 고온의 아스팔트 위로 쓰러져가고 있다. 원인 모를 강한 자연의 힘이 나를 눌러 깨웠다. 새벽 5시 37분, 깔고 누운 요에서 일어나 옷장에서 양말을 꺼내 신었다. 두꺼운 츄리닝을 하나 걸치고 운동화를 신은 뒤, 마당에 갇혀 있던 자전거를 꺼내 대문 밖으로 나왔다. 무작정 페달을 밟아댔다.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는 우리동네에 와 있었다. 우리 동네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아파트 사이로 갇혀버렸다. 한참을 헤메인 뒤 나는 겨우 시멘트 괴물들의 공포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까운 국민학교 운동장안으로 들어가 자전거를 세워두고 차가운 시멘트 스텐드 위에 앉았다. 이른 새벽 해가 뜨기 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이상한 사람들도 다 있네. 저렇게 열심히 살다니?) 서서히 내가 사는 집으로 자전거 핸들을 돌려 나아갔다. 그 서점을 지나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난 곧 그 서점 앞에 자전거를 세울 수가 있었다. 이제 막 문을 연 건 같은 서점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가 보였다. 그리고 한 남자도 ……. |
| 29. |
| 얼마뒤, 그녀는 어떤 돈 많은 집안의 자제분이랑 계약결혼을 하기 위해 그 서점을 떠났다, 그 얼마뒤 그녀는 그새 그 남자와 정이 들었는지 그와 정식결혼을 올려버렸다. 한동안 그녀의 우수가 나에게로 찾아왔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나에게 의미를 남겼다. 우수에 젖은 눈동자, 그 우수는 내가 그녀를 처음 본 이후 줄곧 그녀를 따라다녔다. |
| 30. |
| 어느새 그 책은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채 내 책상에 꽂혀 있었다. <계약커플>. 라디오를 켜고 이불 속에 들어가 엎드린 채, 책을 펴는 순간 잠이 들어버렸다. 또 다시 지루한 아침이 시작되고 있다. 이 지루한 아침은 언제까지 계속 될까? 이 아침을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란 책을 꺼냈다. 천천히 한장을 열고 두장을 넘겼다. 이상하게도 누군가가, 관심도 없는 부분에 뭔가 중요한 뜻이 있는 듯 밑줄을 굵게 그어 놓았다. 어느 문학평론가가 이 책을 '현실 없는 젊음의 치열한 현실'을 적었다고 했다, 그건 아마 말장난일게다. |
| 31. |
| '정비석'씨의 <삼국지>를 읽었다. 큰 사건들이 최근에 내 주위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어났다. 김의 죽음과 그녀의 떠남 …… 김과 그녀에게 내가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英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내 마음엔 어느새 부질없는 공명심이 싹트고 있었다. 어떻든 그 모든 사건은 과거로 남겨질 것이다. 과거는 내 몸에 흐르는 피와도 같은 것 ……. 상처가 나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것 ……. 난 그저 앞으로 상처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일은 태양아 떠오르지 마라. 내가 이 세상 높이 솟아올라 이 세상을 찬연하게 비추리라 ……….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군대부터 갔다 오고 …….) …………………………………… 달아날 길은 오직 위뿐이다. -지드- 달아날 길은 오직 군대뿐이다. -대한남아- …………………………………… 이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 모든 것 다 잊고. |
| 32. |
| 작년 여름이 생각난다. 7월 14일 서대구 병무청 신체검사장에서 나는 2급을 받았다. 내가 대학교라는 데 들어오는데 필요했던 내신 2등급과 일치한다. 묘한 일치다. 이 '2'라는 숫자는 나를 그 사회적 위치 때문에 고민해야 하는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주었고, 이제는 막 고민을 시작하는 내 어린 후배들이 자유롭게 고뇌할 수 있도록 지켜주어야 한다. 내 친구가 그렇게 미워하던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은 결국 내 친구를 죽게한 나 또한 죽어가게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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