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동안 얘길 들어줄수 있나요 그럴지는 모르죠 당신의 얘길지도 ... - 팀, 이야기
나는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든지 단한번도 하지않았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힘들었던 어느 해, 어린 여자에 관하여.
2005년 가을, 박사학위를 마치고 새 회사에 적응한 지 얼마지나지 않아, 내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내내 같이 일했던 회사의 연구소장이 술한잔하고 싶다며 나를 안양으로 불렀다. 그때 나는 양재에 살고 있었다. 범계역에서 1차로 거하게 취한 연구소장은 유흥으로 자리를 마무리하고 싶어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 회사에도 가야했고 이제 막 중요한 임무가 내게 주어지기 직전이었으니 그 준비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범계역에서 조금 걸어나오다 보면 중앙광장이 있고, 그 한모퉁이 상가건물 맨위층엔 Oak bar라는 곳이 있었다. (인연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인가보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Oak Glen이고, 처가가 있는 곳은 English Oak이다.) 몇달전 친한 후배랑 들렀을 때도 그 술집은 그대로 였다. 생각해보니 이 중앙광장에서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괜찮아진 줄 알았어 사람들 만나고 바쁘게 살다 보니 그런 줄 알았어 근데 있잖아 그게 아니더라 착각이더라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거야 - 015B, 그녀에게서 전화오게하는 방법
그 1년쯤전 겨울 나는 소꿉친구의 와이프 소개로 한 여자를 만났었다. 그녀는 약간 통통해 보이는 몸매에 포근한 인상을 가진 어찌보면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여성의 모습에 가까웠다. 하지만 졸업논문준비가 급박했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별 관심을 두지않았다. 어렵게 찾아온 졸업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내가 평생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어마어마한 압박을 견디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야 하는 지금도 그생각은 유효하다.
그녀는 내게 계속해서 연락했고, 어쩔 수 없이 메시지 답장만이라도 해야했다. 으례 그렇겠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그녀는 내게 전화를 요구했고 밤이면 그녀와 제법 긴통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2004년 겨울, 그 당시만해도 인터넷 예매라는 것이 활발하지 않았다. 예매라는 건 미리 공연장에 들러 표를 일찍 사는 것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고싶다고 했다. 대전에 있던 나는 친구에게 부탁해 토요일 오전에 대구의 공연장에 들러 표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뮤지컬을 본 후엔 다시 연구실에 돌아와야했기 때문에 밤늦게 대전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열차표도 미리 사뒀엇다.
공연장에 먼저 도착해 친구를 만나 표를 건네받았다. 그녀는 거의 공연시간에 맞춰서 도착했지만, 주차해놓은 차에 창문이 열렸다며 누군가 전화했다. 잠시 공연장 밖으로 같이 나갔다왔다. 저녁도 같이 못한 채 뮤지컬이 시작되었고 나 자신도 난생 처음보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푹 빠져 감상했다. 명성왕후는 그 당시 서울에서 돈벌고 지방에서 까먹는 순수 국내뮤지컬의 그저그런 쇼에 불과했지만, 나 같은 공연관람 아마추어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내게 있어 운명의 1막이 끝날 쯤 그녀는 누군가와 어두운 공연장 예절에 맞지않게 문자를 주고받았다. 그녀의 휴대폰 불빛을 내 점퍼로 가려주기도 했다.
15분간의 인터미션.
휴식시간이 되었지만 우리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 산 디지털 카메라에 대해 얘기했고, 이제 막 대중화가 진행중이던 디지털 카메라는 가끔 메모리카드에서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인터미션이 끝나갈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일어섰고 백을 의자 위에 올려둔 채 자리를 떠났다. 나는 자리에 계속 앉아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2막이 시작되고 5분이 지나도 그녀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어느 순간 왠 남자가 들어와서 그녀의 백을 집어들더니 자신이 그녀의 친척이며 집에 일이 생겨서 그녀가 먼저 떠나야 한다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그 남자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얼마간 멍하게 앉아 있던 나는 잠시 뒤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공연장 로비에서 무언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내가 계단을 내려오는 사이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나를 향해 다가오던 그 남자는 자신이 그녀의 남자친구라며 나랑 소주 한잔 할 수 있으면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말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즉시 거절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내게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 자신은 그녀와 오랫동안 사귄 사이이며 그녀의 차도 자신이 사준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내내 그 남자의 모습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별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택시를 타고 떠난 뒤였다. 난 그녀와 얘기하고 싶다고 말하고는 그남자를 뒤로 하고 역으로 걸어가 대전행 기차를 기다렸다.
그리고 몇일이 흘러 소꿉친구의 와이프에게서 사정을 전해들었다. 그 둘은 7년을 넘게 사귄 사이였지만 헤어지기로 했으며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내는 중이라고 했다. 아마 그 남자는 그에게 다시 기회가 있을거라 여겼던 모양이다. 친구의 와이프는 그의 행동이 멋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내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만일 저 상황이라면 나는 절대로 저러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런 남자의 모습이 멋있어 보일리가 없었다. 알고 지내는 사이, 친한 사이, 연인 사이의 경계가 어디란 말인가, 중요한 건 서로에게 명확히 표현하는 의사이다.
나는 이 얘기를 주변에 항상 하고다녔다. 오랬동안 혼자 있었던 나에게 이런 이야기는 여자친구 안 사귀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술한잔하며 얘기하기 좋은 레퍼토리였다. 나는 그녀에게 계속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나는 내가 괜찮다는 걸 얘기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우린 더이상 인연이 아니라는 것도 ... 잠깐 언니라는 사람과 통화가 되었지만 내가 남긴 메모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별은 늘 길고 지루한 잠처럼 소리없이 다가와 내 하루를 또 내 일년을 이토록 서럽게 수놓고 기억은 늘 시린 하늘에 달처럼 선명하고 차갑게 내 오늘부터 내 끝날까지 너만을 그리게 하겠지 끝없이 - 이브(EVE), Today
2005년 가을. Oak bar의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나와 그 연구소장은 앞에 서있던 앳된 외모의 바텐더와 얘기를 나누었다. 술에 너무 취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연구소장은 그 바텐더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얘길했고 나는 그녀에게 내 전화기를 주어 전화번호를 남겨달라고 했다. 사실 그 뒤엔 집에 어떻게 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난 집에 가는 와중에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았고, 아침에 다시 계속 연락해도 괜찮겠냐는 문자를 보냈다.
'네'
짧게 온 답문자, 나는 그순간이 연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마도 그땐 정말 순진했었나보다. 대학교와 대학원에 이르는 그 오랜세월동안 한여자만 짝사랑했던 나는 여자들이 하는 행동과 말 속에 숨겨진 미묘한 늬앙스를 잘 알지못했다. 아홉살이나 어린 그녀는 이제 스물셋이었다.
일주일 쯤 지난 어느날, 평촌역 부근 일식집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많은 얘기를 나누었지만 그녀는 내게 자기 집이 어디쯤인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책임한 인터넷 시대에 사는 곳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일요일 오전에 안양에서 축구가 끝나면 그녀의 집 주변을 배회하곤 했었다. 나는 그때 양재에서 안양의 평촌까지 매주 일요일 오전에 운동하러 가고 있었다. 단 한번도 차를 세우고 바라본 적 없었던 비산사거리앞 횡단보도는 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어 누군가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점심 식사 후 그녀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간간히 내 문자에 간단히 답장만 하는 거리를 유지했다. 그녀는 바에게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기때문에 걱정이 되곤 했다.
얼마뒤엔 추석이라 고향인 대구에 내려와있었다. 그녀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문자를 보내자 겨우 통화가 되었다. 꽤 늦은 시간이라 몇마디 나누지 못하고 전화는 끊겼지만 그녀는 내게 다시 문자를 보내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고 했다. 서울로 돌아와 양재역으로 그녀를 불러냈다. 프렌차이즈 스테이크 하우스는 이미 서울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레스토랑이 되었지만 나에게는 이 또한 처음이었다.
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 you ought to know about how much I love you - Glenn Medeiros
양재역 주변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스테이크 하우스에서의 저녁을 끝낸 우리는 안양으로 가는 버스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녀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고백하고 싶었다. 지금의 서초 구민회관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그녀에게 고백했다. 그 당시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그런 순진한 남자였다. 좋아하니까 사귀고 싶다고,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녀는 간단히 거절했다. 그녀가 버스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본 뒤에야 내 가슴이 얼마나 아파오는 지 깨달았다. 그리고 한동안 절망에 사로 잡혀 일주일을 보낸 뒤에야 그녀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오빠 동생사이로라도 지내고 싶다고, 나는 그 일년전의 그 남자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후 그녀는 영화가 보고 싶다고 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나에게 찾아오지 않는 순간이었다. 안양역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나오는 몇분간이 전부였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하얀 자켓도 선물한 기억이 난다.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마 스스로도 굉장히 서투른 방법을 사용했다. 나를 떠밀어 보내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문자를 받았다. 그녀의 번호였지만, 그녀의 문자가 아니였다, 자기 여자친구에게 연락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가 진짜 남자친구라면 여자친구의 전화를 빌려서 낯선 남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그건 마치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다시 심각해졌다. 일년전의 그 기억이 머리를 복잡하고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곧바로 전화했고 그녀는 오랜 친구가 장난으로 문자를 보낸 것이라 했다. 사실 그말을 믿지 않았다, 나는 적어도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관한한 바보는 아니다. 한동안 내가 먼저 연락할 일이 없었다, 그냥 일이나 열심히 하고 싶었다.
한달여의 시간이 흐른 뒤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녀는 얼마후에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기로 되어있었다. 6개월이나 중국에 나가 있는데 자기 안 볼거냐면서, 통화를 한 건지 답문자를 보낸 건지 정확하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회사의 다른 사업장으로 가는 택시 안이었으니 전화를 했을 것 같진 않다. 그리고 내가 일하던 연구소로 돌아와 마무리를 한 후 퇴근 버스에서 내리는 데 다시 남자의 문자를 받았다. 경고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이 모라자도 이건 아니다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이용하고 있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냥 무시했어도 될 일이었을 텐데 그 당시의 나는 그렇게 모질지가 못했다. 우스운 일이지만 그녀에게 마지막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끝내지 못한 경험을 끝내고 싶었다, 좋은 방법으로 이별하고 싶었다. 다시 뮤지컬을 예매했다. 뮤지컬 '아이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선뜻 초대에 응했고, 뮤지컬이 끝난 후 난 새로 산 니콘으로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아직 DSLR에 익숙치 않았던 나는 밤 시간의 실내촬영이 꽤나 힘들었다. 같이 택시를 타고 양재역으로 와서 그녀가 안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자리에 앉은 뒤에도 그녀는 차창 밖의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집에 들어와 어느 정도의 보정을 한 후 그녀에게 다시 사진을 보내주었다. 사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물론 사진을 보내줘서 고맙다는 식의 답장은 없었다.
미련은 끝없이 남았다. 그리고 마지막 만남이 있었다. 그녀가 올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밤으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자 집앞 가게에 들렀다. 양재역에 도착한 그녀는 공중전화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그녀는 전화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커피빈으로 향했다. 커피를 주문한 그녀는 새로 나온 2006년 다이어리를 갖고 싶어 했다. 커피숍 내부의 실내 조명은 꽤나 훌륭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그런 분위기는 내게 어색한 것이었다. 새로 산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몇장 찍었다.
2005년의 마지막 날, 잊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비겁한 행동이라고 한 얘기를 그 남자에게도 전했었나보다. 그 남자는 자신의 전화기로 내게 경고의 메시지를 다시 보냈고 나는 문자를 받는 즉시 그에게 전화를 했다. 내 의도는 적중했다. 잠시 언쟁이 오갔지만 나는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여자는 만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또한 둘 사이의 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이런 사람들하고 조차 그 인연을 좋게 끝내고 싶었나 보다,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그 남자와 통화중에도 그녀는 내게 계속 전화를 해댔다, 전화를 끊어라는 문자까지 와 있었다.
그날밤 이메일을 보냈다, 그녀는 내게 남자친구가 생긴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내가 그녀 자신에게 미련가질 이유가 없다고 했다. 미련 같은 게 아니었다. 그녀의 얘기를 듣고 싶을 뿐이었다. 한동한 가슴이 아팠다. 약간의 기대 조차도 헛된 희망은 내게 꽤나 큰 고통을 주었다. 가슴이 아프다는 말은 감정적인 은유가 아니라 정말로 물리적인 아픔을 의미했다. 며칠 후 공중전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받지 않기를 기대했다. 정말 받을까봐 급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술에취해 숨소리조차 차가워 졌을때 어둠속에서 귓속에 속삭이는 그대 나 이제 날아가네 내 꿈속에서 미소와 그대란 작은 날개를 가졌으니... - Epik High, Paris
결혼정보회사 듀오에 가입했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곧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한국이라는 사회에 어떤 여자들이 존재하는 지 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달에 두번씩 마주하는 여자들은 내게 다 똑같아 보였다. 그중 한 여자는 내게 꽤나 적극적이었다. 내가 조금만 나쁜 남자였더라면 어땠을까, 그녀의 대한항공 상무의 엄친딸이었다. 나같은 남자에게 왜 관심을 갖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모욕적인 순간도 있었다, 어떤 여자는 내가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다지 특별해 보이는 여자가 아니었다. 계약했던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서비스를 중지시켰다. 회사를 옮긴다는 핑계를 대고, 그후로 커플매니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3년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2008년 여름, 같이 축구를 하던 형님 한분이 소개팅을 잡아주었다. 이쁘지 않은 얼굴에 좋아 보이는 성격을 가진 여자였지만, 그리 마음이 가지 않았다. 우리는 주말이면 강남과 신촌을 돌아다니며 나름의 데이트를 즐겼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친구가 잠깐 외국에 나가있는 사이 나를 만나러 나온 여자였고, 소개자리에 왜 나왔냐는 내 질문에 엄마가 나가래서 나갔었다는 어이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내가 연락을 끊은 뒤에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고 정말 몇달 뒤 거짓말 같이 남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다.
마음의 상처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나이가 되어 버렸나보다. 그러니 더이상 한국여자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강남과 종로를 떠돌며 외국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텍사스 출신의 미국교포에게 한번 차이고, 루마니아 출신의 캐나다 여자에게 다가가다 보기좋게 거절당하기도 했다. 겨울이면 내가 스노보드를 가르치곤 했는데, 별로 어필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난 그 사이 회사도 옮겼고, 같이 운동하던 축구팀이 있는 안양으로 이사도 했다. 겨울이 좋아졌다. 혼자서 야간 스노보드를 타는 게 기분 좋은 일상이었다.
해가 바뀌어 다시 여름이 왔다. 여름휴가 시즌에 회사는 일주일간의 여름 휴가를 소진하라고 장려했지만 나는 마땅히 할일도 없었고, 갈 데도 없었다. 윗사람이랑 얘기한 후 3일정도만 휴가를 내고 집에 쳐박혀 있었다. 밤늦게까지 TV를 보다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문자가 왔다. 오래전 안양의 그녀에게서. 답장이 없자 그녀는 다시 내게 문자를 보냈다. 사실 그날은 내가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바꾼 번호를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1년짜리 서비스가 끝나는 마지막 날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그 마지막 날에 내게 옛날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마치 서랍속에서 오래된 내 명함을 발견하고 안부가 궁금해 연락한 것처럼 했지만, 그게 아니란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모른척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주 늦게 일어나 집앞의 분식집에 들러 또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있는데, 또 다시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Another trick ... 흠, 신기하군, 연락하지마, 미안하다, 잘지내라.'
귀찮아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너무나 건조한 답장을 했다. 그녀는 아마도 당황한 모양이다, 안부는 물었으니 괜찮다고 답장이 오고는 몇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아마 내게 먼저 사과를 했었어야 된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안부를 물은 걸로 만족한다고 했다. 사과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그저 내인생에 두번 다시 간섭하지 않으면 된다.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솔직히 어떻게 지내는 지 궁금했었다. 나는 그사이 그녀 목소리도 잊었고 그녀의 얼굴도 잊었다. 오래전에 이미 사진을 다 없애버렸으니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말투는 조금 바뀐 것 같았다, 20대 초반의 뀌여운 말투가 아니였다. 요즘 뭐하고 지내냐는 내 질문에 학교 졸업하고 취업하기 위해서 준비도 하고 공부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랑 이런 정도의 대화조차 나눈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닽았다. 정말 그때 나는 뭘 했던걸까. 전화를 끊을 시간이 되었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잘 지내고 안녕.'
그녀는 너무나 공손하게도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울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2년의 시간이 흐른 2010년, 미국 출장이 있어 Apple의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에 다녀왔다. 내 맘속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아름다운 애플의 캠퍼스는 아직 엔지니어로서 할일이 많이 남아있다고 느끼는 나에게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잘 가지 않던 외부 워크샵을 신청했다. 사당역에 서서 2호선으로 갈아타기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동안 나를 응시하던 한 여자를 느꼈다,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아마도 그 여자는 계속해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그녀쪽으로 바라봤을 때 그녀는 울고 있는 듯 보였다. 다음 순간 플랫폼으로 열차가 도착했고, 나는 사람들을 헤집고 객실의 중간 쯤에 자리를 잡았다. 이상하게도 그 장면은 계속 머리속에 맴돌았고 그 여자가 누구였는지 떠올리는 데 3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왜 울고 있었을까.
우리는 사실 많이 보지 못했다. 내가 그녀를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게 이상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늘 내 머리와 가슴 속에 살고 있었고 언젠가 길거리에서 마주칠 지 모른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마치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어져 있던 인연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신호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나에게서 잊혀졌다.
때로는 잊지 못할 순간들이 불시에 찾아오곤 한다, 2010년 그해 가을 나에게는 새로운 사람들이 필요했다, 같이 취미생활을 공유하고 주말에 같이 술한잔하며 얘기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인터넷을 뒤져 서울대역 부근의 조그만 화실을 찾아냈다. 새로운 화실에 나란히 앉아 수채화를 그리던 여자는 나보다 11살이나 어렸다, 스물 다섯, 너무나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그녀는 늘 내 눈을 바라보고 싶어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남자친구도 있다는 애가 내게 왜 이러는 걸까. 그녀가 화실에 처음 왔던 날 우리는 밤이 늦도록 술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 생각에 그날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정말 너무나 설레였다. 그리고 그건 내가 살면서 여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마지막 감정이 될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않았다. 가끔 문자를 주고 받을 때면 잘 지내고 있으니 언제한번 보자고 했지만 그해 크리스마스 파티 이후엔 그녀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두려웠다. 또 다시 상처 받을 테고 아픈 건 결국 나일테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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